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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의 가해자에게 (학교폭력, 트라우마, 방관)

by 티키타카 2026. 6. 4.

솔직히 저는 이 드라마를 처음 접했을 때 "또 학폭 소재구나" 하고 가볍게 넘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직장 후임으로 만난다는 설정 하나가, 단 한 시간 만에 학교폭력이 남기는 심리적 상흔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교복입고 서있는 학생들

가해자는 잊고, 피해자는 갇힌다: 트라우마의 비대칭

KBS 드라마 스페셜 〈나의 가해자에게〉는 42년간 신인 작가의 등용문으로 이어져 온 단편 드라마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3년 차 교사 진우가 13년 전 자신을 괴롭혔던 가해자 성필을 신입 교사로 맞닥뜨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 설정이 강렬한 이유는 단순히 "재회"가 아니라, 가해자는 피해자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의 핵심적인 비대칭을 건드리는 지점입니다. PTSD란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이후 그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고 일상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상태를 말합니다. 가해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데, 피해자는 13년이 지난 그 순간에도 몸이 굳어버립니다. 제가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답답하게 느낀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진우가 밤새 준비한 신입 교사 OJT 파일을 찢어버리려 할 때, 그 분노가 너무나 이해됐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는 학교폭력 피해자가 겪는 심리적 역동(psychological dynamics)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심리적 역동이란 개인의 내면에서 무의식적 갈등과 감정이 서로 충돌하며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과정을 뜻합니다. 진우는 분노와 회피, 정의감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정규직 전환을 원하면서도, 방관자였던 담임교사와 똑같은 어른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장면은 보는 내내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학교폭력이 남기는 장기적 영향은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성인기 우울, 불안, 대인관계 어려움과 직결된다는 점은 여러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사실입니다(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드라마 속 진우의 모습은 통계 속 숫자가 아닌, 살아있는 한 사람의 현실이었습니다.이 작품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또 다른 축은 학생 희진입니다. 희진은 교내 권력 구조를 꿰뚫는 눈치와 협상력으로 진우를 자신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합니다. 이 캐릭터는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구조적 문제가 학생에게까지 내면화된 결과물로 읽힙니다. 제 경험상 이런 캐릭터가 오히려 더 소름 돋는 이유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존재할 법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방관의 구조: 왜 어른들은 그때도, 지금도 침묵하는가

드라마에서 진우의 학창 시절 담임은 괴롭힘을 알면서도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13년 뒤, 진우 자신도 같은 상황에서 자리를 피합니다. 이 반복 구조야말로 이 작품이 단순한 복수극이 아님을 보여주는 핵심입니다. 방관(bystander effect)이란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개인이 개입을 꺼리게 되는 심리 현상입니다. 원래 사회심리학에서 긴급 상황에 적용되는 개념이지만, 학교폭력 연구에서도 이 개념은 핵심 설명 도구로 사용됩니다. 실제로 학교폭력 피해 상황에서 주변 학생의 대다수가 인지하고도 개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교육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출처: 교육부).제가 이 작품을 보면서 특히 주목한 장면은 은서가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수십 번 도움을 요청했는데 언제나 침묵만 돌아왔다는 은서의 말은, 진우가 과거 자신에게 했던 경험과 정확히 겹칩니다. 피해자가 말을 안 해서 모른다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변명인지를 이 장면 하나가 증명해 버립니다. 제 솔직한 감상으로는, 이 장면에서 진우가 말문이 막혀버리는 연기가 이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강렬했습니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방관의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학창 시절 담임 교사: 진우의 신고를 인지했음에도 외면
  • 학급 구성원 전체: 눈을 감으라고 했을 때 진우만 눈을 감음
  • 성인이 된 진우: 은서의 괴롭힘을 목격하고도 자리를 회피
  • 학교 행정 구조: 이사장 손녀라는 권력 앞에 모든 판단이 흔들림

이 목록이 씁쓸한 이유는 특정 인물의 악함 때문이 아닙니다. 구조 자체가 개인의 용기를 꺾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필이 희진의 압박에 굴복해 태도를 바꾸는 장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악한 의지가 아니라 구조적 취약성(structural vulnerability)이 방관을 만들어냅니다. 구조적 취약성이란 개인이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져도 조직이나 제도의 압력 앞에 행동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 환경적 조건을 의미합니다.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복수의 감정이 전면에 부각되다 보니, 진우가 트라우마를 소화하고 회복해 가는 내면의 과정이 조금 더 깊게 다뤄졌으면 했습니다. 한 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의 한계겠지만, 피해자의 회복 서사 없이 복수나 정의 실현에 방점이 찍히면 "상처는 결국 혼자 감당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가치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학교폭력을 단순히 청소년기의 해프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직업 선택, 인간관계, 자존감 전반에 걸쳐 작동하는 장기적 영향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진우가 교사가 된 이유가 "나 같은 애도 너 같은 애도 없는 학교를 만들겠다"는 다짐이었다는 사실은, 피해자가 상처를 어떻게 삶의 방향으로 전환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었습니다.〈나의 가해자에게〉는 현재 KBS 드라마 클래식 채널 요약본과 웨이브, 왓챠, 애플 TV에서 풀 버전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 시간 안에 이토록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 흔하지 않습니다. 학교폭력이 남기는 상처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그리고 방관하지 않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직접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fTfjL7D8F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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