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노인 주인공이 나오는 액션 영화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솔직히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설마 저 할머니가 악당들을 제압한다고?" 싶었는데, 영화가 끝났을 때 그 의심은 완전히 부끄러운 편견이 되어 있었습니다. 《더 라스트 스탠드 오브 앨런 콜》은 나이와 성별에 관한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부수는 작품입니다.

    할머니가카우보이모자를쓰고담배를물고있다.

    고정관념을 깨는 주인공 설정

    액션 장르에서 흔히 쓰이는 원형(archetype)은 대개 젊고 건장한 남성 주인공입니다. 여기서 원형이란 특정 장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 유형을 가리킵니다. 《더 라스트 스탠드 오브 앨런 콜》은 그 공식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주인공 앨런 콜은 헤비 스모커이자 남편과 사별한 노인으로, 처음 등장할 때는 그냥 외로운 시골 할머니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앨런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KGB 소속의 전문 킬러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KGB란 냉전 시대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로, 정보 수집과 암살 등을 담당한 비밀 정보기관입니다. 전직 킬러가 조용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는 설정은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 전체를 다시 보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린 샤예 배우의 연기가 이 설정을 완전히 살려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평범한 노인처럼 걷다가 돌변하는 순간의 눈빛 변화는 CG나 편집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카리스마(charisma)라는 단어가 이토록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배우를 오랜만에 봤습니다. 카리스마란 단순한 외모나 위압감이 아니라, 스크린 밖으로 에너지가 넘쳐 나오는 자기장 같은 존재감을 의미합니다. 이 영화에서 린 샤예는 그걸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존엄성을 건 싸움 —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이유

    이 영화를 단순한 복수극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만 읽히지 않았습니다. 핵심은 '집'입니다. 악덕 사업가 듀크는 빚을 갚기 위해 앨런의 땅에 리조트를 건설하려 하고, 협상이 통하지 않자 폭력으로 강탈을 시도합니다.

    저도 비슷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오래 살던 동네가 재개발 구역으로 묶이면서 골목 가게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걸 지켜봤을 때, 그 허전함은 단순히 익숙한 풍경을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공간에 쌓인 기억들이 함께 지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앨런이 집을 지키려는 이유가 그렇게 이해됐습니다. 낡은 건물 한 채가 아니라, 남편과 함께했던 삶의 흔적 전체를 지키는 싸움인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돋보이는 장치 중 하나가 모티프(motif)의 활용입니다. 모티프란 작품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주제를 강화하는 상징적 요소를 뜻합니다. 앨런의 집, 지하 비상 통로, 에비의 아버지 바비가 남긴 캠핑카 — 이것들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인물의 과거와 진실을 품고 있는 공간들로 반복 등장합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문제는 현실에서도 낯설지 않습니다. 국내에서도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원주민이 삶의 터전을 잃는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2023년 기준 국내 도시정비사업 구역 수는 전국적으로 수백 곳에 달하며, 그 과정에서 세입자와 원주민의 이주 문제가 반복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출처: 국토교통부). 영화가 허구를 빌려 이야기하지만, 거기서 느끼는 분노와 공감은 충분히 현실적입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서사 구조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주인공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는 점층적 공개 방식으로 긴장감을 유지함
    • 에비의 성장 서사가 앨런의 행동선과 평행하게 진행됨
    • 집과 땅이라는 구체적 공간이 추상적 주제(존엄, 기억, 저항)를 구현하는 장치로 기능함

    여운 — 영화가 끝난 뒤 남은 것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장면은 혈투도 폭파 장면도 아니었습니다. 앨런이 집 앞에 서서 끝까지 물러서지 않던 그 모습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도 "여기서 물러날 생각 없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 장면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표현이 딱 맞는 순간이었습니다. 카타르시스란 억눌린 감정이 극적인 경험을 통해 한꺼번에 해소되는 심리적 정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 이론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인데, 이 영화에서는 비극이 아니라 통쾌한 역전으로 그것이 구현됩니다. 후반부 액션이 다소 과장됐다고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솔직히 고령의 주인공이 저 정도 전투력을 발휘하는 건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비현실성이 크게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영화적 과장이 오히려 감정적 통쾌함을 강화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화 속 폭력 표현의 수위와 관객의 심리적 만족도 간의 상관관계는 영화학 연구에서도 다뤄진 주제입니다. 장르 관습과 관객 반응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장르 영화에서의 과장된 폭력은 현실 모방보다 감정 해소 기제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출처: 한국영화학회).《더 라스트 스탠드 오브 앨런 콜》은 액션 영화에서 흔히 무시되는 나이 든 여성의 강인함을 정면으로 이야기한 작품입니다. 화려한 특수효과나 유명 배우의 몸값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닌데도, 보고 나면 묵직한 것이 남습니다. 저처럼 인간의 의지와 존엄성을 다루는 영화를 좋아한다면 충분히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나이가 쌓인다는 게 약해지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조용하지만 강하게 말해줍니다.


    참고: https://youtu.be/hr93dWvLIxY